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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23일

늦은 밤 아내가 설겆이를 시작한다. 내가 한다고 해도 극구 만류하며 딸그락 연주자가 된다. 부엌에서 예쁜 얼굴을 한 여인을 멍하니 바라본다. 나를 안 만났으면 이 시간에 유라시아 상공 어디쯤에서 마카다미아를 먹으며 후배들과 아늑한 수다를 나누고 있지 않았을까? 이쯤되면 그녀를 더 편하게 해 줄거라 확신했는데... 자신감이 곧 패배감으로 이어진 고등학교 수학시험을 본 기분이다. 돈이 100원도 없던 적은 평생을 통틀어 이번이 처음이다. 자신감이여, 부디 돈 앞에서 작아지지 말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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뽈수기의 수액 (Swag)

간호사가 자기가 모르고 더 비싼 수액을 놨으니 다짜고짜 차액을 내라고 한다. 온몸이 아프지만 젠틀한 나는 그 불안정해 보이는 막내뻘 느낌의 간호사가 처량해보여 '너가 실수한 거니 반씩 부담하자"고 제안했다. 사실 굳이 내가 낼 필요도 없는 상황이었지만 앞서 말했듯 난 아파도 젠틀한 중년이다. 그 와중에 우리의 뽈여사가 병원에 도착했다. 이 어이없는 상황을 맞닥들인 그녀는 마그네토처럼 병원 건물을 들어올릴 듯한 포스로 간호사들에게 강력한 어필을 했다. 일단 계산부터 하라는 선임간호사의 언행이 문제였다. 결국 젠틀한 나도 입을 열었다. "후임이 실수했으면 선임도 (매뉴얼을 가르쳐주지 않은) 책임이 있는거죠. 그렇게 본인 실수가 아니니 나몰라라 방관하는 처사 때문에 화가 나는 겁니다" 그 선임간호사는 여전히 '뭔 X소리야'하는 표정이다. 결국 차액을 받지 않겠다고 했지만 난 내가 한 약속이니 지불을 했다. 야비무사. 야비한 사람들이 무사히 살아간다. 아프지 말아야지. 아무튼 아내 덕분에 할 말 다한 하루였다.

엘리시오의 여름 토요일 아침

주말 아침부터 바쁘다. 시오의 영어 경시대회가 있는 날. 한달 전에도 토요일에 치뤄진 영어대회 때문에 아내의 허리가 폭발했는데 오늘 또 그녀는 극성교육대열에 합류해 주말 아침을 경쟁과 강식의 세계로 인도한다. 집합장소에서 시오의 오랜 친구 규민이를 만났다. 역시 마음이 짠하다. 빈둥거려야 할 토요일 아침에 퉁퉁 부은 모습의 아홉살 소녀들은 영문도 모른채 영문테스트에 임한다. 여름을 밀어내는 선선한 바람이 오늘 학생들의 시험지를 몽땅 다 날려버리면 좋겠다. 그럼 시험 결과고 뭐고 상관없이 가을 하늘의 아름다움을 얘기할 시간이 많아질테니. 야무지게 입을 다문 시오의 입에서 콧노래를 대신할 스캣이 쫀쫀하게 흘러나올텐데-